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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수정본

아가씨가 죽었어? 죽였어?

발치만 바라보아도 걸음을 쉬고 돌아보게 하시는 아가씨를 모셨어. 그 분의 발은 뽀얀 빛깔이 줄줄 흐르는 터라 마님이 외국서 들여온 조각상 같았지. 죽였냐고? 얘길 마저 들어봐 봐. 아가씨는 나랑 사랑에 빠졌어. 신분은 둘째 치고 여인과 사랑을 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마. 우선 내 소개부터 할게. 아가씨의 아버님. 그러니까 주인어르신이 내 아버님을 모함해서 가문을 송두리째 뽑아 망하게 하셨어. 반역죄였으니 오라비부터 해가지고 식솔도 싹 죽었지. 복수하고 싶었어. 혈육을 죽여서는 아니고 아가씨 따귀 때릴 만큼 나도 잘 먹고 잘 살 수가 있었는데 주인어르신이 그걸 망쳤잖아. 오냐 사이좋게 나앉아보자 이런 속셈이었지.

우여곡절 끝에 원수 집안으로 들어가 원수 딸내미를 모시려고 지겨운 자식새끼 데리고 사는 아주머니에게 금품을 쥐어주며 천한 말투를 배우고 고생도 하고 그랬어. 지금 아주머니는 도박에 미쳐 사는 남편과 자식새끼를 떠나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젊은 남정네를 끼고 살고 있다 하더라고. 암튼, 원수 딸내미는 아름다웠어. 지 애비하고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아주 예뻤어. 아까 말했잖아. 아가씨는 가던 걸음도 쉬고 돌아보게 하신다고. 처음에는 아가씨가 주인어른께 예쁨 받고 사는 줄로만 알았거든. 근데 도가 지나쳐서 뒷길로 캐보니까 아가씨가 양딸이래. 닮아도 심하게 안 닮았다 했다.

아가씨를 모신지 7년짼가 8년짼가 마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아가씨가 소문을 듣고 오셨나봐. 내가 주인어르신이 음해한 가문의 살아남은 딸이란 소문을. 그때 여덟 술잔에 술을 따라 내오라 하셔서 퍼뜩 가지고 올라갔지. 은색 쟁반을 들고 아가씨 앞에 선 내 모습을 빤히 보시더니 술잔을 비워 차곡차곡 쌓으셨어. 아가씨는 마지막 술잔이 일곱째 잔과 겹쳐질 때쯤 쟁반을 뒤엎고 나를 이불에 던지시더라고.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네 몸 어딘가에 찍혀있으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소리치셨지. 그리고 우셨어. 어린아이처럼 우시면서 저고리와 치마를 벗기는데 아가씨 손이 참 따듯해서 얼떨결에 같이 울며 아가씨의 손이 향하시는 대로 가게끔 놔두었어.

들켰냐고? 아니. 지웠거든. 평생을 가는 큰 흉터로 내가 덮었거든. 아가씨는 이게 뭣하다가 생긴 자국이냐 묻지 않고 하염없이 쓰다듬으셨어. 문을 잠그고, 그래… 눈이 맞은 게지. 아가씨가 내 옷을 벗기고 이곳저곳 만지시다가 둘이 눈이 맞은 거야. 복수도 잊고 아가씨가 아가씨인 것도 잊고 그녀의 이름을 입술에 담았지. 연이야, 연이야. 나의 연이야. 연이는 아가씨가 아닐 때가 제일 어여뻤어. 후……. 잠시 쉴까. 자신을 죽이러 온 몸종이랑 사랑에 빠진 아가씨와 복수를 잊고 아가씨를 탐한 몸종의 이야기는 감질나게 들려주는 편이 듣기에도 편하잖아.


아직도 아가씨를 사랑해?

아직도 연이를 사랑해. 당연한 소리 아냐. 죽으나 사나 저를 돌아보게 하시는 여인을 어떻게 한시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명이를 잊을 만큼 사랑했는데. 명이가 누구냐면 오래전 내 몸종이야. 죽었지. 혈육 때문에 복수를 다짐한 게 아니라고 한 거 기억나? 맞아. 억울하게 죽은 명이 때문이야. 그래서 새 이름을 명이라고 지었어. 연이에게 명이가 불러지면 나는 움직이고 복수를 위해 달려가지. 그러라고 지은 이름인 걸. 복수심을 잊지 말라고 사랑하는 여인 이름에다 낙인까지 새겨가며 원수의 집채에 쳐들어간 나는 복수에 성공했을까? 네가 예상하는 결말을 듣고 싶어. 뭘 예상하든 간에 전부 빗나갈 테니. 이대로 아가씨와 몸종의 사랑 이야기를 멈추면 너는 첫 질문을 다시하게 될 거야. 그러긴 싫지? 전희를 달굴 겸 첫날밤 얘기를 계속해볼게.

연이는 벗은 몸이 어울렸어. 비녀를 풀고 솜이불에 누워 신음이 새어 나갈까봐 자기 손가락을 무는 아가씨가 어찌도 야한지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뗄 수가 없더라고. 잠자리는 처음인데도 곧잘 따라와 주시고 눈이 맞은 관계치곤 속궁합이 좋았어. 아가씨와 내가 부부였다면 밤일로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었겠지. 병약한 몸을 타고나신 아가씨는 아기를 낳을 수 없을뿐더러 미모는 수려했지만 그 놈의 임신이 문제가 되어 혼담이 오가지 않아 혼기가 한참 지나 있었어. 주인어르신이 건드는 짓을 보고 들었다만 그녀는 내가 처음이었을 거야. 웃으면서 눈물범벅이 된 여인이 연이라서 행복했지. 명아, 멀리 도망가자는 말도. 8년이면 죽은 이들을 잊기에는 충분한 시간인가.

후회하는 표정이라고? 아니야. 네가 뭘 예상하든 간에 전부 빗나갈 거야. 말했잖아.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냐. 주인공이 후회를 하지도 슬프지도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거든. 이 이야기의 최후는 너랑 나, 단 둘이 치닫는 결말이야. 슬프니? 후회하니? 거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 명이를 죽인 원수 가문을 몰살시키면 후회되거나 슬퍼질 줄 알았어. 그런데 이건 그렇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고.

너는 어때. 아가씨가 죽었을까 죽였을까 궁금하지. 아가씨는 몸종을 사랑하셨지만 소문이 불씨가 되어 아가씨 마음에 불신을 퍼트렸어. 걷잡을 수 없는 불신의 불길이 일파만파 번지고 원수의 집채를 집어삼킬 지경이 되었지. 나는 불을 잠재울 빗물이 아니었고 아가씨 또한 불을 상대할만한 여인은 아닌지라 이 자리서 복수를 할 건지 주인어르신에게 맞아 죽을 건지 골라야 하는 상황이 됐단 말이야. 마침 비밀리에 사들인 총이 치마폭에 숨겨진 상태였고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기면 원수를 죽일 수가 있었지. 대신 이걸로 아가씨 목숨까지 취해야만 했어. 때리는 것밖에 자질이 없는 원수와 옆방에 마님을 죽이고 나와서는 아가씨 방으로 뜀박질하니 활옷을 입은 아가씨가 수줍게 웃고 계셨어. 그때 깨달았지. 아가씨, 하인들 다 어디 갔어요?


아가씨가 죽인 거야?

그 많던 하인을 아가씨가 죽였을까. 하인들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질을 쳤을까.
너도 알다시피 이건 하인들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야. 무엇이 중하냐고? 너의 첫 질문을 떠올려봐. 혼례복을 입으신 아가씬 무척 아름다웠어. 새빨간 옷감이 원수와 마님이 흘린 피 같았지. 나에게도 물론 그들의 피가 묻어 있어서 같은 혼례복을 입고 혼례를 치른 기분이 들었어. 깨고 싶지 않은 시간이 다시금 내려온다면 연이와 내가 입을 맞춘 그날 밤이 될 거야. 설마, 지금 아가씨를 죽였냐고 묻는 거니? 맞다. 네 입장에서 아가씨가 죽였냐고 묻는 거지. 아가씨가 죽었을까 죽였을까. 한 가진 확실해.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냐. 너랑 나, 단 둘이 치닫는 결말에 대한 이야기지.

그렇지 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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